니우라 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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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우라 히사오는 일본과 한국에서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1971년 일본프로야구(NPB)에 데뷔하여 1983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1976년부터 1979년까지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이후 1984년 한국 프로야구(KBO)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여 한국 이름 김일융으로 1986년까지 활동하며 1985년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1987년 일본으로 복귀하여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등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은퇴 후에는 해설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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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우라 히사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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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김일융 |
출생일 | 1951년 5월 11일 |
출생지 | 도쿄도 세타가야구 |
사망일 | 해당사항 없음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NPB 경력 | |
데뷔 | 1971년 4월 13일 |
마지막 경기 | 1992년 9월 23일 |
소속 구단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1년~1983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987년~1991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2년) 야쿠르트 스왈로스 (1992년) |
통산 성적 | 승-패: 116승 123패 평균 자책점: 3.45 세이브: 39 탈삼진: 1706 |
주요 수상 | 일본 시리즈 우승 (1971년, 1972년, 1973년, 1981년) 올스타 (1976년, 1978년, 1979년, 1987년, 1988년) 센트럴 리그 평균 자책점 (1977년, 1978년) 센트럴 리그 베스트 나인 (1978년) 파이어맨상 (1978년) 미들 릴리프 투수상 (1978년) 센트럴 리그 탈삼진왕 (1979년) 컴백 선수상 (1987년) |
KBO 경력 | |
데뷔 | 1984년 |
마지막 경기 | 1986년 |
소속 구단 | 삼성 라이온즈 (1984년~1986년) |
통산 성적 | 승-패: 54승 20패 평균 자책점: 2.53 탈삼진: 322 |
주요 수상 | KBO 리그 우승 (1985년) |
기타 정보 | |
드래프트 | 드래프트 외 |
고등학교 | 시즈오카 현립 시즈오카 상업 고등학교 (중퇴) |
2. 일본 프로야구 선수 시절 (1968년 ~ 1983년)
니우라 히사오는 1971년 NPB에 진출하여 13시즌 동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약했다.[1] 1971년에 1군으로 승격한 후,[9] V9 최종 연도인 1973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일본 시리즈 챔피언십 3연패에 기여했다. 그러나 니우라는 이 기간 동안 시리즈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입단 당시 어깨 부상과 어린 나이(17세) 때문에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지시로 공을 잡지 않고 런닝만 하며 재활에 집중했다.[8] 히로시마에서 정형외과 치료를 받으며 아르바이트로 몸을 만들기도 했다.[8]
1973년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강속구와 커브를 무기로 3승을 기록했고, 1974년에는 7승 6패 1세이브로 두각을 나타냈다.[9] 1975년 나카시마 시게오 감독 부임 후에는 선발과 구원 모두에서 부진하며 2승 11패를 기록했다.[9] "메뚜기 심장"[10]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나카시마 감독은 꾸준히 니우라를 기용하며 성장을 도왔다.[9] 같은 해 8월에는 2군에서 조정을 거친 후 1군 복귀전에서 1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첫 승을 기록했다.[9] 나카시마 감독의 권유로 금연을 결심한 것이 1976년 활약의 계기가 되었다.[11]
1976년, 규정 이닝을 달성하고(3위, 방어율 3.11),[9] 50경기에 출전하여 절반은 선발 투수로, 절반은 구원 투수로 활약하며 3개의 완봉승으로 리그 공동 1위를 기록했다.[1] 스즈키 다카마사와 고바야시 시게루에 이어 방어율 3위를 기록했고, 센트럴 리그 올스타팀에 처음으로 선발되었다.[1] 일본 시리즈 2차전에 2이닝을 던졌지만, 팀은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패했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와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이자 마무리 투수로 맹활약했고,1976년, 1977년 리그 2연패에 공헌했다.[9]
1977년에는 2.32의 평균자책점으로 센트럴 리그 최고 기록을 세웠고, 9세이브로 리그 공동 1위를 기록했다.[1] 일본 시리즈에 다시 출전하여 1, 2, 4차전에 등판했고, 5차전에서 패전을 기록했다. 1978년에는 15승과 15세이브를 기록하며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고, 63경기 출장으로 센트럴 리그 1위를 차지했다.[1] 2.81의 평균자책점으로 다시 한번 타이틀을 차지했고, 두 번째 올스타팀에 선발되었으며, 소방수 상과 중간 계투상을 모두 수상했고,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다.[1] 1979년에는 15승 11패, 5세이브, 3.43의 평균자책점, 236⅓이닝 동안 223탈삼진으로 센트럴 리그 탈삼진 1위를 차지하며 세 번째 올스타팀에 선발되었다.[1]
1980년 팔꿈치 부상으로[9] 3승 4패 1세이브에 그쳤다.[9] 1981년 후지타 모토시 감독 부임 후에는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세이, 사다오카 쇼지로 이어지는 선발 3인방에 밀려 출전 기회가 줄었다.[9] 1982년 8월 28일 다이요전에서 선발 등판했지만, 초반에 대량 실점하며 패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 경기는 "226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다.[9] 1983년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9] 결국, 나카시마 시게오의 권유로[13] 1983년 시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떠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9]
2.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71년 ~ 1983년)
니우라 히사오는 1971년 NPB에 진출하여 13시즌 동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약했다.[1] 1971년에 1군으로 승격한 후,[9] 1973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일본 시리즈 챔피언십 3연패에 기여했다. 그러나 니우라는 이 기간 동안 시리즈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입단 당시 어깨 부상과 어린 나이(17세) 때문에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지시로 공을 잡지 않고 런닝만 하며 재활에 집중했다.[8] 히로시마에서 정형외과 치료를 받으며 아르바이트로 몸을 만들기도 했다.[8]1973년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강속구와 커브를 무기로 3승을 기록했고, 1974년에는 7승 6패 1세이브로 두각을 나타냈다.[9] 1975년 나카시마 시게오 감독 부임 후에는 선발과 구원 모두에서 부진하며 2승 11패를 기록했다.[9] "메뚜기 심장"[10]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나카시마 감독은 꾸준히 니우라를 기용하며 성장을 도왔다.[9] 8월에는 2군에서 조정을 거친 후 1군 복귀전에서 1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첫 승을 기록했다.[9] 나카시마 감독의 권유로 금연을 결심한 것이 1976년 활약의 계기가 되었다.[11]
1976년, 규정 이닝을 달성하고(3위, 방어율 3.11),[9] 50경기에 출전하여 절반은 선발 투수로, 절반은 구원 투수로 활약하며 3개의 완봉승으로 리그 공동 1위를 기록했다.[1] 스즈키 타카마사와 고바야시 시게루에 이어 방어율 3위를 기록했고, 센트럴 리그 올스타팀에 처음으로 선발되었다.[1] 일본 시리즈 2차전에 2이닝을 던졌지만, 팀은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패했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와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이자 마무리 투수로 맹활약했고,, 리그 2연패에 공헌했다.[9]
1977년에는 2.32의 평균자책점으로 센트럴 리그 최고 기록을 세웠고, 9세이브로 리그 공동 1위를 기록했다.[1] 일본 시리즈에 다시 출전하여 1, 2, 4차전에 등판했고, 5차전에서 패전을 기록했다. 1978년에는 15승과 15세이브를 기록하며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고, 63경기 출장으로 센트럴 리그 1위를 차지했다.[1] 2.81의 평균자책점으로 다시 한번 타이틀을 차지했고, 두 번째 올스타팀에 선발되었으며, 소방수 상과 중간 계투상을 모두 수상했고,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다.[1] 1979년에는 15승 11패, 5세이브, 3.43의 평균자책점, 236⅓이닝 동안 223탈삼진으로 센트럴 리그 탈삼진 1위를 차지하며 세 번째 올스타팀에 선발되었다.[1]
1980년 팔꿈치 부상으로[9] 3승 4패 1세이브에 그쳤다.[9] 1981년 후지타 모토시 감독 부임 후에는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세이, 사다오카 쇼지로 이어지는 선발 3인방에 밀려 출전 기회가 줄었다.[9] 1982년 8월 28일 다이요전에서 선발 등판했지만, 초반에 대량 실점하며 패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 경기는 "226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다.[9] 1983년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9] 결국, 나카시마 시게오의 권유로[13] 1983년 시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떠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9]
3. 한국 프로야구 선수 시절 (1984년 ~ 1986년)
니우라는 1984년 신생 KBO 리그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여 한국 이름 김일융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3] 1984년 16승 10패, 평균자책점 2.27을 기록했다. 1985년에는 25승 6패, 평균자책점 2.79, 11완투를 기록하며 삼성의 KBO 리그 통합 우승을 이끌었다.[2] 당시 리그 형식에 따라 라이온즈가 전후반기 모두 1위를 차지했기에 한국시리즈는 열리지 않았다.[2] 김일융은 그 해 첫 12번의 선발 등판에서 10승을 거두며 KBO 역사상 가장 빠른 10승 달성 기록을 세웠다.[3] 김일융의 그 해 25승은 KBO 단일 시즌 승리 부문에서 3위에 해당한다. 그는 1985년 KBO 리그 골든 글러브를 25승을 기록한 팀 동료 김시진에게 내주었다. 1986년에도 13승 4패, 평균자책점 2.53을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이어갔다.
니우라는 1986년 당뇨병 진단을 받았고, 언어 장벽(니우라는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으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는 한국 이름 '''김일융'''으로, 삼성의 에이스로서 1984년부터 3년간 활약했다. 3년간 54승 20패를 기록했으며, 특히 1985년에는 25승 6패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한때는 강속구 투수였지만, 한국 야구계에 재적하는 동안 기교파로 변신했다. 그러나 일본어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팀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팀 동료들에게서 연장자에 대한 존칭인 "형"이라고 불리지 못하고, 시종일관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고 고백했다.[14] 니우라는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출가도 되지 않았어요. 3년간 많이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월급이 전혀 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적은 남겼고 팀의 우승에 공헌했습니다(1985년 삼성은 한국 챔피언). 기술적인 것도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선수에게는 가르쳤습니다.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15]라고 말했다.
니우라의 KBO 3년간의 기록은 54승 20패(승률 .730), 평균자책점 2.53, 완투 32회, 완봉 8회였다.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3. 1.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84년 ~ 1986년)
니우라는 1984년 신생 KBO 리그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여 한국 이름 김일영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3] 1984년 16승 10패, 평균자책점 2.27을 기록했다. 1985년에는 25승 6패, 평균자책점 2.79, 11완투를 기록하며 삼성의 KBO 리그 통합 우승을 이끌었다.[2] 당시 리그 형식에 따라 라이온즈가 전후반기 모두 1위를 차지했기에 한국시리즈는 열리지 않았다.[2] 김일영은 그 해 첫 12번의 선발 등판에서 10승을 거두며 KBO 역사상 가장 빠른 10승 달성 기록을 세웠다.[3] 김일영의 그 해 25승은 KBO 단일 시즌 승리 부문에서 3위에 해당한다. 그는 1985년 KBO 리그 골든 글러브를 25승을 기록한 팀 동료 김시진에게 내주었다. 1986년에도 13승을 거두며 활약했다.니우라는 1986년 당뇨병 진단을 받았고, 언어 장벽(니우라는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으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는 한국 이름 '''김일융'''으로, 삼성의 에이스로서 1984년부터 3년간 활약했다. 3년간 54승 20패를 기록했으며, 특히 1985년에는 25승 6패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한때는 강속구 투수였지만, 한국 야구계에 재적하는 동안 기교파로 변신했다. 그러나 일본어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팀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팀 동료들에게서 연장자에 대한 존칭인 "형"이라고 불리지 못하고, 시종일관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고 고백했다.[14] 니우라는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출가도 되지 않았어요. 3년간 많이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월급이 전혀 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적은 남겼고 팀의 우승에 공헌했습니다(1985년 삼성은 한국 챔피언). 기술적인 것도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선수에게는 가르쳤습니다.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15]라고 말했다.
니우라의 KBO 3년간의 기록은 54승 20패(승률 .730), 평균자책점 2.53, 완투 32회, 완봉 8회였다.
연도 | 소속 | 등 판 | 선 발 | 완 투 | 완 봉 | 무 볼 넷 | 승 리 | 패 전 | 세 이 브 | 홀 드 | 승 률 | 타 자 | 투 구 회 | 피 안 타 | 피 홈 런 | 볼 넷 | 고의 사구 | 死 구 | 탈 삼 진 | 폭 투 | 보 크 | 실 점 | 자 책 점 | 평균 자책점 | WHIP |
---|---|---|---|---|---|---|---|---|---|---|---|---|---|---|---|---|---|---|---|---|---|---|---|---|---|
1984년 | 삼성 | 38 | 23 | 14 | 3 | -- | 16 | 10 | 3 | -- | .615 | 907 | 222.0 | 191 | 7 | 78 | 4 | 6 | 155 | 5 | 1 | 68 | 56 | 2.27 | 1.21 |
1985년 | 34 | 28 | 11 | 3 | -- | 25 | 6 | 0 | -- | .806 | 920 | 226.0 | 200 | 13 | 77 | 6 | 5 | 107 | 4 | 0 | 87 | 70 | 2.79 | 1.23 | |
1986년 | 19 | 19 | 7 | 2 | -- | 13 | 4 | 0 | -- | .765 | 573 | 138.2 | 120 | 8 | 45 | 4 | 2 | 60 | 1 | 0 | 47 | 39 | 2.53 | 1.19 | |
KBO : 3년 | 91 | 70 | 32 | 8 | -- | 54 | 20 | 3 | -- | .730 | 2400 | 586.2 | 511 | 28 | 200 | 14 | 13 | 322 | 10 | 1 | 202 | 165 | 2.53 | 1.21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4. 일본 프로야구 복귀 (1987년 ~ 1992년)
1987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하여 일본 야구계에 복귀했다.[16] 한때의 구위는 사라졌지만, 다카하시 가즈미와 발렌수엘라에게 배운 체인지업[16]과 다종류의 변화구로 노련한 투구를 보여 11승(4완봉, 107탈삼진)을 거두며 컴백상을 수상했다.
1988년에는 10승을 거두었다.
1989년에는 8승으로 다이요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다. 8월 4일에는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옛 소속팀인 요미우리를 상대로 13안타를 맞고도 완봉 승리를 거두며, 최다 피안타 완봉의 프로 야구 기록을 세웠다[17]. 이 경기에서 이닝별 피안타는 2, 1, 3, 3, 2, 1, 0, 1, 0[18]으로, 5회까지 11안타를 맞았다. 1990년에 감독이 스도 유타카로 바뀌면서 선발에서 중간 계투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15].
1992년에 오쓰카 요시키와의 교환 트레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감독 다부치 고이치와 충돌하여, 본인으로부터 이적을 신청한 이례적인 일[15]이었지만, 재적 기간은 불과 반년 만에 그 해 시즌 도중에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다시 이적했다. 야쿠르트에서는 우승 경쟁도 막바지에 접어든 8월 16일의 요미우리전에서 사이토 마사키를 상대로 승리[15], 5회 2실점으로 2년 만에 승리 투수가 되었고, 같은 달 25일의 다이요전에서도 승리 투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5회 무실점으로 팀의 승리에 기여하는 등, 이 해 14년 만의 리그 제패를 달성하는 팀에서 몇 안 되는 경험 많은 베테랑으로서 마지막 빛을 발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시즌이 끝나고 다음 해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고,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복귀한 나가시마에게 전화했더니 "좌완 투수는 많으니까"라는 말을 듣고 은퇴했다[15].
4. 1.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시절 (1987년 ~ 1991년)
1987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하여 일본 야구계에 복귀했다.[16] 한때의 구위는 사라졌지만, 다카하시 가즈미와 발렌수엘라에게 배운 체인지업[16]과 다종류의 변화구로 노련한 투구를 보여 11승(4완봉, 107탈삼진)을 거두며 컴백상을 수상했다.[16] 1988년에는 10승을 거두었다. 1989년에는 8승을 거두며 팀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했다.[17] 8월 4일에는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옛 소속팀인 요미우리를 상대로 13안타를 맞고도 완봉 승리를 거두며, 최다 피안타 완봉 프로 야구 기록을 세웠다.[17][18] 1990년에는 감독이 스도 유타카로 바뀌면서 중간 계투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15]4. 2.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1992년)
1992년 시즌 도중 오쓰카 요시키와의 교환 트레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다.[15] 그러나 감독 다부치 고이치와 충돌하여, 본인이 직접 이적을 신청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고,[15] 불과 반년 만에 그 해 시즌 도중에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다시 이적했다.[15]야쿠르트에서는 우승 경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8월 16일 요미우리전에서 사이토 마사키를 상대로 5회 2실점으로 승리하며 2년 만에 승리 투수가 되었다.[15] 8월 25일 다이요전에서도 5회 무실점으로 팀 승리에 기여하는 등,[15] 14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한 팀에서 베테랑으로서 활약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시즌 후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고,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복귀한 나가시마에게 전화했지만 "좌완 투수는 많다"는 말을 듣고 은퇴했다.[15]
5. 은퇴 이후
은퇴 후에는 니혼 TV, 후쿠오카 방송, RF 라디오 일본, 도호쿠 방송 등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한국과의 인연으로 동아일보 그룹의 '스포츠 동아' 일본 주재 통신원으로도 활동했다.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의 '삿포로 앰비셔스'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TBC 파워풀 베이스볼의 라쿠텐 주최 게임 전국 중계에도 아주 드물게 출연했다.
6. 출신 학교
시즈오카 현립 시즈오카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7. 선수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1968년 ~ 1983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1987년 ~ 1991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1992년), 야쿠르트 스왈로스(1992년)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법적으로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1] 196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는데, 이는 NPB 드래프트 자격 요건을 "일본 국적을 가진 자"에서 "일본 학교에 등록된 자"로 변경하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1]
1971년 NPB에 데뷔하여 13시즌 동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최고의 시기를 보냈는데, 1976년에는 3개의 완봉승으로 리그 공동 1위를 기록했고, 스즈키 타카마사와 고바야시 시게루에 이어 방어율 3위를 기록했다. 그해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올스타팀에 선발되었다. 1977년에는 2.32의 방어율로 센트럴 리그 최고를 기록했고, 9세이브 역시 리그 1위와 타이를 기록했다. 1978년에는 15승과 15세이브를 올리며 방어율 챔피언을 다시 차지했고, 두 번째 올스타팀에 선발되었으며, 소방수 상과 중간 계투상을 모두 수상했고, 베스트 나인 상을 센트럴 리그 최고의 투수로 받았다. 1979년에는 센트럴 리그 탈삼진 1위를 차지했고, 세 번째 올스타팀에 선발되었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는 팔꿈치 문제로 인해 출전 시간이 줄었다. 1987년 NPB로 복귀하여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서 뛰면서 컴백상을 수상했다. 1987년과 1988년에는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1989년 8월 4일에는 예전 팀인 요미우리를 상대로 13안타를 맞고 완봉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NPB 투수가 완봉승을 거두면서 허용한 최다 안타 기록이었다. 1992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니우라는 1984년 신생 KBO 리그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여 한국 이름 김일영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3] 1984년 16승 10패, 평균자책점 2.27을 기록했다. 1985년에는 25승 6패, 평균자책점 2.79, 완투 11회를 기록하며 라이온즈의 KBO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2] (당시 리그 형식에 따라 라이온즈가 전후반기 모두 1위를 차지했기에 한국시리즈는 열리지 않았고, 삼성의 우승이 결정되었다.)[2]
김일영은 그 해 첫 12번의 선발 등판에서 10승을 거두며 KBO 역사상 가장 빠른 10승 달성 기록을 세웠다.[3] 김일영의 그 해 25승은 KBO 단일 시즌 승리 부문에서 3위에 해당한다. 그는 1985년 KBO 리그 골든 글러브를 25승을 기록한 팀 동료 김시진에게 내주었다. 1986년에도 13승 4패, 평균자책점 2.53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니우라는 1986년 당뇨병 진단을 받았고, 이와 언어 장벽(니우라는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이 겹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니우라의 KBO 3년간의 기록은 54승 20패(승률 .730), 평균자책점 2.53, 완투 32회, 완봉 8회였다.
7. 1. NPB
니우라 히사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1968년 ~ 1983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1987년 ~ 1991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1992년), 야쿠르트 스왈로스(1992년)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법적으로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1] 196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는데, 이는 NPB 드래프트 자격 요건을 "일본 국적을 가진 자"에서 "일본 학교에 등록된 자"로 변경하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1]
1971년 NPB에 데뷔하여 13시즌 동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최고의 시기를 보냈는데, 1976년에는 3개의 완봉승으로 리그 공동 1위를 기록했고, 스즈키 타카마사와 고바야시 시게루에 이어 방어율 3위를 기록했다. 그해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올스타팀에 선발되었다. 1977년에는 2.32의 방어율로 센트럴 리그 최고를 기록했고, 9세이브 역시 리그 1위와 타이를 기록했다. 1978년에는 15승과 15세이브를 올리며 방어율 챔피언을 다시 차지했고, 두 번째 올스타팀에 선발되었으며, 소방수 상과 중간 계투상을 모두 수상했고, 베스트 나인 상을 센트럴 리그 최고의 투수로 받았다. 1979년에는 센트럴 리그 탈삼진 1위를 차지했고, 세 번째 올스타팀에 선발되었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는 팔꿈치 문제로 인해 출전 시간이 줄었다. 1987년 NPB로 복귀하여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서 뛰면서 컴백상을 수상했다. 1987년과 1988년에는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1989년 8월 4일에는 예전 팀인 요미우리를 상대로 13안타를 맞고 완봉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NPB 투수가 완봉승을 거두면서 허용한 최다 안타 기록이었다. 1992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7. 2. KBO
니우라는 1984년 신생 KBO 리그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여 한국 이름 김일영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3] 1984년 16승 10패, 평균자책점 2.27을 기록했다. 1985년에는 25승 6패, 평균자책점 2.79, 완투 11회를 기록하며 라이온즈의 KBO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2] (당시 리그 형식에 따라 라이온즈가 전후반기 모두 1위를 차지했기에 한국시리즈는 열리지 않았고, 삼성의 우승이 결정되었다.)[2]김일영은 그 해 첫 12번의 선발 등판에서 10승을 거두며 KBO 역사상 가장 빠른 10승 달성 기록을 세웠다.[3] 김일영의 그 해 25승은 KBO 단일 시즌 승리 부문에서 3위에 해당한다. 그는 1985년 KBO 리그 골든 글러브를 25승을 기록한 팀 동료 김시진에게 내주었다. 1986년에도 13승 4패, 평균자책점 2.53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니우라는 1986년 당뇨병 진단을 받았고, 이와 언어 장벽(니우라는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이 겹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니우라의 KBO 3년간의 기록은 54승 20패(승률 .730), 평균자책점 2.53, 완투 32회, 완봉 8회였다.
8. 수상 및 타이틀 경력
8. 1. 타이틀
니우라 히사오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최고 평균자책점을 2회(1977년, 1978년) 기록했는데, 이는 스가노 도모유키에 이은 센트럴 리그 2위 타이 기록이다. 1978년에는 최우수 구원 투수, 1979년에는 최다 탈삼진(당시 타이틀 아님), 1977년에는 최고 승률(당시 타이틀 아님)을 기록했다. 한국 프로 야구에서는 1985년에 다승왕을 차지했다.8. 2. 수상
니우라 히사오는 1978년 최우수 투수, 베스트 나인, 월간 MVP(7월)에 선정되었다. 1987년에는 컴백상을 수상했다.9. 개인 기록
니우라 히사오는 올스타 게임에 5회(1976년, 1978년, 1979년, 1987년, 1988년) 출장했다.
1971년 4월 13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차전(주니치 스타디움)에서 6회말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여 3이닝 무실점으로 첫 등판을 기록했고, 같은 경기에서 시마타니 긴지로부터 첫 탈삼진을 기록했다. 4월 29일 대 한신 타이거스 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는 첫 선발로 나서 6이닝 무실점으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9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 6과 1/3이닝 무실점(강우 콜드)으로 첫 완투 승리 및 첫 완봉 승리를 동시에 달성했다. 1974년 7월 3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7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9회말 2사에서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3이닝 무실점으로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1981년 4월 9일, 대 다이요 웨일스 3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3회초에 마에토마리 테츠아키로부터 역대 60번째로 1000탈삼진을 달성했다. 1988년 7월 1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6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9이닝 1실점 완투 승리로 역대 97번째 100승을 달성했다. 1989년 8월 29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2차전(나고야 구장) 2회말에 나카무라 타케시로부터 역대 31번째로 1500탈삼진을 기록했다. 1990년 8월 5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18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9회초 2사에서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3이닝 무실점으로 역대 63번째 500경기 등판을 기록했다.
10. 등번호
니우라 히사오는 1968년에 42번, 1969년부터 1972년까지 40번, 1973년부터 1992년 시즌 도중까지 28번, 1992년 시즌 도중부터 시즌 종료 때까지 49번의 등번호를 사용했다.
11. 에피소드
11. 1. 당뇨병 투병
니우라는 한국 야구계 시절에 당뇨병을 앓게 되어, 인슐린 주사를 매일 맞아야 했다.[20] 현역 시절에는 당뇨병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호텔 화장실 등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주사를 맞았다.[20] 그러나 주사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병의 영향으로 체중이 감소하면서 각성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20] 2013년에 방송된 프로그램에서 현재도 당뇨병과 싸우고 있는 모습이 방영되었다.젊은 시절에 흰 쌀밥과 사이다를 즐겨 먹었는데, 이를 본 마키노 시게루 코치에게 "밥에 사이다를 뿌려 먹는 거냐"는 놀림을 받았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20] "사이다를 밥에 뿌려 차조밥처럼 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단 것을 좋아했으며, 이는 당뇨병의 원인 중 하나로 의심받기도 했다.[20]
11. 2. 별명 '캇파'
신우라 히사오는 땀이 많은 체질 때문에 캇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1] 호리우치 츠네오가 땀에 흠뻑 젖은 신우라를 보고 "앗, 캇파다, 캇파…"라고 외친 데서 유래했다.[21]11. 3. 그 외
니우라 히사오는 2003년 일본 TV 계열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다운타운의 가키노 쓰카이야 아라헨데!!》의 벌칙 게임 "블라디보스토크" 편에 출연하여 하마다 마사토시를 공격하는 역할로 등장했다.[22]아내 토시에는 1살 연상으로, 시라유리 학원 고등학교, 페리스 여학원 단대를 졸업했다. 라디오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정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던 도쿠마무시 산타유의 어시스턴트로서 고라쿠엔 구장을 방문하여 선수 인터뷰를 했다. 니우라의 팬임을 알게 된 세키모토 요시시의 중매로 2년간의 교제 끝에 1976년 1월 30일에 결혼했으며, 피로연에는 도쿠마무시도 참석했다.[22] 니우라는 아내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 주었으며, "지금의 제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내 덕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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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期「長嶋巨人」のエース左腕 甲子園準V、韓国移籍…波乱万丈の野球人生を経て次世代に伝えたい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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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年目の初勝利とV9戦士の仲間入り 話の肖像画 元プロ野球選手・新浦壽夫<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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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大の感謝は妻へ 話の肖像画 元プロ野球選手 新浦壽夫(7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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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의 재구성 - 역대 재일 교포 투수 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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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거인팀 입단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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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종-헥터, KBO 최초 2년 연속 선발 20승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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